내용: 초대기획 개인전 일시 : 2016년9월23일(금)~10월12일(수) 장소: 피아룩스 갤러리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706-5 시간: PM14:00~PM17:00 월요일 휴관 오프닝: 9월23일(금) PM7:00
강희영 개인전 서문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
이 곡을 연속해서 840번 연주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고요함 속에서 진지한 부동성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 에릭 사티의 음악 지침 중
강희영의 작품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강하다. 거울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은 얼핏 풍경화처럼, 녹색 톤의 바리에이션이 지배적인 유채물감으로 고갱이나 루소의 이국적인 숲을 떠올리게 하는 불투명한 터치가 거울 면 위를 빽빽이 덮고 달 혹은 해처럼 보이는 원형의 형태가 나무 사이, 공간 어디에 떠 있다. 옆으로 길게 비치한 작품의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집요하게 나를 쫓는 달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풍경화를 바라보는 자세를 거두고 작품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면 모든 것은 달라진다. 정작 빽빽한 수풀 사이에 실재하고 나를 기다리는 것은 뭔가를 보겠다고 눈을 크게 뜬 나의 얼굴, 그리고 내 뒤에 놓여 있는 현실 세계다.
20세기 작곡가 중 드라마, 영화 등의 배경 음악으로 지겨울 만큼 사용되는 짐노페디의 작곡자 에릭 사티는 그가 사후에 발표하기를 신신당부한 곡 ‘벡사시옹’에서 고요함 속에서 진지하게 부동성을 준비하라고 지침을 썼다. 이 곡은 총 18시간이 걸리는 곡으로 존 케이지가 애착을 가지고 시도했던 실험적인 음악이지만 사실은 단순한 18개의 음들이 변주하는 곡으로 840번을 반복하려면 연주자나 듣는 이 모두 극도의 인내력과 중독성 혹은 무아지경이 필요로 한 음악이다. 이 18음의 단순함과 반복성은 곧 우리 삶의 일상성과 같다. 삶의 다이나믹한 희로애락도 범주로 묶는다면 어쩌면18개의 카테고리를 크게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그 일상을 견디고 표현하기 위해 이중적이고 괴팍했던 천대 사티는 진지한 부동성을 먼저 요구했다. 부동성은 거울의 한 속성이기도 한데 유사 이래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 해 오브제 거울은 실용성을 넘어 때로는 주술적인 도구로, 문학적인 소재로 끝없이 예술가들을 자극해 왔었다.
작가 강희영에게 거울은 비추고, 반영하고, 인식하고, 해석하는 물성의 자극제로 설명되어 왔지만 사실 거울이라는 매개보다 작품 전체를 주목하고 바라보면 강희영의 작품들은 ‘빨아 들이고 벗어내게’ 하는 강렬한 느낌이 존재한다.
이 벗어냄이 사티의 음악을 떠오르게 한다. 짐노페디라는 단어 자체가 벌거벗은 소년들이라는 뜻으로 과잉된 감정이나 불필요한 장식과 로망을 벗고 적확한 형태로 주제를 표현하려는 작곡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강희영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우리를 끌어당겨 그 앞에 멈추게 하고 한 발 더 내딛는 순간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의 생얼을 마주하게 한다. 그리고 민망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 그 이국적인 정원은 나의 현실과 뒤섞이기 시작한다. 사티의 요구대로 당황하지 말고 진지하게 부동성을 되찾아 보자. 굴러가는 눈동자를 멈추어 삶의 한 곳을 응시하고 그 속으로 침잠하면 마치 작품 속 원시적인 칼라의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착각이 들며 입고 있던 옷들이 벗겨지는 듯 낭비적인 과대감정들이 벗어지기 시작한다. 극도의 인내력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조금만 더 부동의 자세로 거울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가는 차갑거나 고압적으로 우리를 거울 앞에 불러내지 않는다. 강희영은 그것이 반복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음악의 첫 마디처럼 유혹적으로 우리를 끌어 당긴다. 가득 차고 이지러지는 달의 형태를 한 작품 안에 병치하거나(작품 ‘현재’), 관객이 이동하면서 작품으로부터 관찰 당하는 듯한(작품 ‘그 순간’) 경험을 살림으로써 시간적 환상까지 재현해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또렷이 부동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시인 이상의 ‘거울’이 그 답을 제시한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이쪽과 똑같아 보이는 거울 속 저편에 없는 것은 딱 하나, 소리다. 내가 강희영의 작품 앞에서 부동의 시간을 끝내고 삶의 즐거움으로 춤을 추고 분노로 가득한 소리를 질러도 거울 속 나는 살아있는 그림자 같을 뿐이다.
‘아담과 이브의 동산’이라는 작품은 태초의 공간 안에 숲과 나무와 열매와 검은 늪, 호수가 있다. 그 호수가 담고 있는(비추는 것은) 불투명한 검은색 혹은 푸르스름한 흰빛으로 표현된 수면뿐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화적 비현실성이 확대되는 장면이다. ‘The Hole’이라는 작품은 그 비현실성이 극대화된다. 추상적으로 표현된 소용돌이, 여름 나무들의 무수한 녹색처럼 식물적인 칼라의 형상은 그러나 진득하게 흘러내리며 자연 이라기에는 너무나 규칙적이고 의도적으로 하나의 출구를 찾아 들어간다.
빨려 들어간다.
그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마주칠 때 우리는 움직일 수 있을까?
다시 마주치는 그것,
그리고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
Comentarios